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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을 가다

민족의 미래를 가꾸는 성스런 길에서

시간:2018-06-13 09:02:15 편집:实习生

-원 중국조선족소년보사 한석윤 사장의 이야기

한석윤 사장은 1943년 3월 2일, 길림성 훈춘시 반석향 태양촌에서 태여났습니다. 1967년 8월,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3309병퇀을 따라 북대황에서 인생길을 개척하기 시작, 그후 연변의약공사, 주인민정부번역과를 거쳐 중국조선족소년보사 당조서기 겸 사장 사업을 맡고 장장 20여년을 달려오시다가 정년퇴직 후에도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를 발족시키고 회장일을 맡아하며 현역처럼 뛰였었습니다.


한석윤 사장은 중국조선족소년아동사업을 자기의 천직으로 삼고 불철주야로 뛰였습니다. 주당위에서 요직에 오라는 것도 마다하고 공청단중앙, 중앙통전부,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전국소선대사업위원회, 공청단동북3성위원회 등 곳을 다니며 소년보사의 영향력을 높이고 중국에서의 조선족어린이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많은 일들을 해왔습니다.

소년보 초창기 한석윤 사장은 사내 임직원들을 이끌고 연변박물관의 헌 창고 한칸을 빌어서 신문을 꾸렸고 사진기 한대도 없던 당시의 《연변소년보》를 그후의 량호한 사업환경을 마련한 <<중국조선족소년보>>로 성장발전시키는 데 마멸할 수 없는 공헌을 하였습니다. 성출판국에서 진행하는 검사에서 소년보는 가장 높은 점수를 따내였고 첫패로 길림성 1급 신문으로 되였으며 전국의 300여개 소년아동잡지 가운데서 골간신문으로 부상, 당시 련속 3차나 국가급 표창을 받기도 했습니다. 한석윤 사장도 300여개 소년아동간행물 책임자 가운데서 뽑은 10여명밖에 안되는 부회장 가운데서 유일한 소수민족부회장으로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사장재임기간 해마다 ‘사랑의 일기’ 공모, ‘소발명소론문’ 공모, ‘수학신동컵’경연, ‘삼성컵사진’공모, ‘백두어린이글짓기상’ 공모,‘고마운 스승님상’공모, ‘고마운 보도원상’공모 등 다채로운 활동들을 펼쳐 우리의 조선족후대들의 심신건강과 각 방면의 건전한 발전에 량호한 인적, 물적 조건을 창조해주는 데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중국소년아동신문출판계의 최고상이라 불리우는 ‘엽성도상’ 을 수상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소수민족문학상 및 한국방정환문학상도 수상하여 이미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아동문학가입니다.


또한 재임기간 중국조선족장학회를 설립하고 매년 70~80명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500여명 어린이들한테 무료로 신문을 보내주었으며 수백명 빈곤어린이들한테 장학금을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상기의 여러가지 활동을 조직하기 위하여 한석윤 사장은 직접 해내외 기업인, 지성인들을 방문하면서 지난 10년간 활동경비만 250여만원어치 해결해왔습니다. 원 연변대학 김병민 총장(교장)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일찍 벼슬길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족소년보사에서 일생을 보낸” 아동사랑의 실천자로서 지방신문인 <<중국조선족소년보>>를 전국 신문의 반렬에 올려 이 신문이 명실공히 조선족어린이들의 ‘여론중심, 활동중심’이 되여주었고 중소학교 결손가정 아이들이 60% 이상 된다는 조선족어린이들의 현실에 가장 먼저 안타까워하면서 사랑의 손길을 주었습니다.

당시 한석윤 사장과 함께 북경에 다녀온 적 있는 중국조선족소년보사의 한 로기자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언젠가 나는 한석윤 사장을 따라 소년보사의 경비문제로 당시 중공중앙 총서기인 호요방 동지를 만나러 북경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엄청난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80년대에 이런 일은 실로 쉽지 않은 일이였습니다. 경비를 절약하기 위하여 우리는 북경까지 줄곧 침대차 없이 자리표만 떼고 그냥 눌러앉아 긴 려행을 했었습니다. 북경에서는 더구나 간고하였습니다. 돈을 절약하느라 단 한번 택시를 타지 않아 발이 다 부르텄고 식사는 기본상 곽밥으로 에웠습니다. 때론 천진만두로 에울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때 시간상 오차로 호요방 총서기를 만나진 못했고 당시 중공중앙 통전부에서 사업하는 호요방 동지의 아드님과 전국소선대사업위원회 주임 진해연 동지를 만나 자기들 신문의 실제 곤난을 반영하였으며 신문사의 정황회보서를 호요방 동지한테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얼마후 호요방 동지는 친필비준서를 쓰시여 통전부에 내려보냈습니다. 그 내용은 대개 연변의 소년보사 동지들의 일을 (돈이 얼마 들지않으니…) 통전부에서 알아서 잘 해결해주도록 하라는 것이였습니다. 통전부에서는 인차 문건을 내고 공청단동북3성위원회에서 물심량면으로 소년보를 뒤받침해주도록 지시하였습니다.

또 한번은 ‘전국근로소대, 지혜소대 여름철야영(全国勤巧小队夏令营)’참가차로 길림성 룡정시룡정실험소학교의 홍매 어린이와 료녕성 본계시 왜두산조선족소학교의 조경애 어린이를 데리고 한석윤 사장이 북경으로 간 적이 있습니다.

항상 머리속에 소년보와 아이들을 담고 있는 그였기에 이번 기회가 우리 조선족애들의 위상을 높이고 우리 민족 신문의 위신도 수립하는 좋은 기회라는 걸 그는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번에 등영초 동지가 전국에서 모여온 56개 소수민족 어린이들을 만나줄 가능성이 있다는 정보를 알아내고 연변박물관에 달려갔습니다. 당년 주은래 총리와 등영초 동지께서 연변에 왔을 때 연변가무단 배우들과 함께 찍은 흑백사진이 있는 걸 발견하고 그걸 크게 확대하여 멋진 액틀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중국조선족어린이 23만명(초중생까지 포함)이 등영초 동지한테 올리는 문안편지를 써가지고 떠났습니다. 중남해에 있는 등영초 동지의 저택 –서화청(西花厅)에서 이 기념사진을 등영초 동지한테 드리고 공청단중앙 동지들의 비준을 거쳐 홍매 어린이가 당장에서 그 편지를 읽는 영광을 가지게 되였습니다.

당시 국무원에서는 대표단한테 접견시간을 20분밖에 주지 않았습니다. 그 짧디짧은 시간에 전국의 56개 소수민족 어린이, 보도원 등 100여명을 대표하여 꽤 긴 문안편지를 읽은 애는 유독 우리 민족 어린이 홍매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희색이 만면하여 그들이 가져간 흑백사진을 보던 등영초 동지가 처음엔 연변에서 왔다고 하니 연안 변경에서 왔는가고 착각하시다가 조선족이라고 반복해 설명하자 “아, 조선족, 조선족-” 하고 불렀습니다. 마침 사진에서 등영초 동지는 우리 민족 한복을 입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석윤 사장도 감격하여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가정에서는 좋은 남편, 좋은 아빠였습니다. 그의 자식들에 대한 인내력있는 사랑과 교양하에 자식들도 크나큰 의력으로 석사과정, 박사과정을 마치게 되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도 미국솔로몬대학교 명예문학박사로 되다보니 그들의 메일이나 전화 내용은 퍼그나 남들의 부러움을 자아내군 했습니다. 서로서로 “한박사님, 한박사님” 하니 말입니다.

너무나 드바쁘던 세월에 자식 셋을 끌끌한 인재로 키워낸 한석윤 사장은 후에는 또 외손녀 혜경이를 알뜰살뜰 키워 중점대학에 붙이였습니다.

한석윤 사장은 언제나 은행나무처럼 깨끗한 분이였고 인자한 분이였습니다. 그는 그때까지 소년보사에 수백만원의 자금을 협찬해다가 아이들의 활동경비로 쓰고 여러가지 장학상을 설치하여 빈곤학생들에게 썼지만 자신은 항상 소박한 생활에 젖어있었습니다… 그는 또 이에 만족함이 없이 한국대교출판사와 교류를 훌륭히 하여 대교출판사로부터 수십만원어치의 도서를 인입하여 연변대학 도서관, 연변작가협회 자료실과 연변의 여러 학교 도서실에 자동차로 실어다주었습니다. 그리고 한국 일기재단과 교류를 이끌어내여 거의 해마다 중국 조선족 일기대왕들을 조직하여 한국에서 진행하는 국제대회(당시 참가 국가는 중국, 한국, 미국, 카나다, 일본, 대만 등)에 참가시켜 큰 상을 받게 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로청중앙의 초청을 이끌어내여 연변의 우수한 어린이 대표단을 수차 조선에 보내여 문화교류를 하게 했습니다.

당시 공청단중앙 서기처 서기로 있던 호금도 동지가 연변에 와서 시찰하실 때 그는 신봉철 동지와 함께 호금도 동지의 친필 제사도 받았습니다.

록음이 물들기 시작하는 연길공원의 동쪽언덕, 이곳이 바로 한석윤 사장께서 다년간 로심초사 가꾸어오신 그 유명한 동시동네입니다.

북쪽으로부터 채택룡동시비, 김례삼동시비, 윤정석동시비, 윤동주동시비, 최문섭동시비 등이 갖가지 아름다운 형태로 차례로 세워져 아이들과 새떼들과 저하늘 꽃구름을 부릅니다.

한석윤 사장은 중국조선족을 대표하는 동시인이고 아동문학가입니다. 아이들을 사랑한 것 만큼 한석윤 사장은 동시, 동요도 많이 창작하여 우리 중국조선족아동문단에 큰 진동을 던져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선후로 자치주진달래문예상, 한국방정환아동문학상, 전국소수민족문학상, 중국엽성도상 등 묵직한 상들도 안아왔습니다. 작가, 시인으로서의 그는 제일 짧은 시간에 제일 알쭌한 작품을 제일 많이 창작해내고 있는 열매 많은 작가로 각인되였습니다.

2006년 4월 6일 한석윤 사장은 퇴직 후 민간인 신분으로 어린이들에게 사랑을 주고 문화를 준다는 취지로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를 발족시키고 회장으로 취임했습니다. 명예회장으로는 오장숙(원 주인대상무위원회 주임), 신봉철(원 길림성로동청 부청장), 고문에는 박문일(원 연변대학 총장), 김광수(원 주당위선전부 부부장)인데 중국조선족사회에서 거물급들이 포진했고 그만치 진흥회사업도 템포가 빠르고 굵직한 일들도 많이 했습니다. 한석윤 사장은 말합니다. “힘이 있을 때 무슨 일이든지 많이 해야지요. 아동문학은 우리 민족 문학의 기초입니다. 제가 아동문학을 하는 리유는 여기에 있지요.”

그렇습니다, 아동문학은 단순히 문학인 개인의 사명이 아닌 전반 우리 민족 후대들을 저 푸른 하늘에 높이높이 날궈주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더우기 아동문화는 기존 세대들과 여러 세대들의 각고한 노력과 기음매기, 땀흘려 걸구기에 달려있는 가장 중요한 공정입니다. 한석윤 사장은 이 가장 중요한 공정의 앞장에서 하나하나의 난관을 깨뜨리면서 줄기차게 달려오신 우리 당의 훌륭한 소년아동사업일군이기에 손색없습니다.

림금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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