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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첨산자, 두메산골이 키운 돌배나무

시간:2020-09-06 17:07:15 편집:权现善

《중국조선족소년보》 본호에서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8돐을 맞으며 지난 세기 80년대에 연변주위 서기, 주장으로 사업하셨고 중공중앙 통전부 부부장,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을 력임하셨던 조선족의 민족간부 리덕수할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소개합니다. 생활환경이 어려웠던 동년, 소년 시절과 대학시절을 보내신 리덕수할아버지의 사적은 친구들의 좋은 귀감이 될 것입니다.

-편집부

100여년 전 일입니다. 조선 충청남도에 한 리씨 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리덕수의 조상들이였습니다.

1910년, 일제는 조선을 강제적으로 합병하였습니다. 망국노로 된 피난민들은 피타는 설음을 안고 정든 고향을 떠나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 중국 동북지역에 모여들었습니다.

1923년, 리덕수의 할아버지 일가도 피난민들을 따라 길림성 왕청현 동광향 첨산자(尖山子)라는 자그마한 시골마을에 자리를 잡게 되였습니다.

리덕수의 부친 리복헌은 리씨 가문의 장손이였습니다. 1923년에 부모님을 따라 중국에 건너올 때 할아버지의 나이는 겨우 11살이였습니다.

첨산자는 두메산골입니다. 동네 어귀 동남쪽으로 산세가 가파로운 큰 산이 마치 예리한 칼날마냥 하늘을 찌르고 있었는데 바로 그 산중턱 기슭에 이 마을이 자리잡고 있어 첨산자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였답니다. 마을 주변은 끊임없이 기복을 이루는 장백산 줄기를 따라 산발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산비탈 아래로는 맑디맑은 시내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유서 깊은 곳 첨산자

첨산자는 일찍 장백산 일대에서 소문이 자자했던 ‘소왕청’골 항일근거지였고 또 동만특위 사령부가 있었던 항일유격구이기도 하였습니다. 1933년 4월 17일부터 19일 사이에 이곳에서 벌어졌던 유명한 ‘첨산자전투’는 연변인민의 항일투쟁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1943년 음력 동지달 스무하루(기원 1943년 12월 17일), 바로 리복헌네 초가집에서 한 남자애의 자지러진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새 생명이 태여났습니다. 31살에 첫 아들을 보게 된 리복헌은 갓 태여난 아들한테 리덕수(李德洙)란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 이름 속에는 자기 아들이 조선민족의 전통적 미덕을 이어받아 앞으로 리씨 가족으로 하여금 유유히 흐르는 두만강처럼 대를 이어 세세대대로 줄기차게 번성해나기를 바라는 뜻이 들어있었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40돐 경축 대회에서 연설하시는 리덕수


리덕수의 할아버지는 리덕수가 태여나기 전에 이미 세상을 뜨셨습니다. 리덕수의 할머니 한명숙은 항일전쟁시기에 늘 항일련군 전사들에게 밥을 지어주고 옷을 씻어주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살벌한 일제 통치시대에 자칫하면 생명까지 잃을 수 있는 큰 모험이였습니다. 리덕수는 어려서부터 할머니 손에서 자랐으므로 할머니한테 각별하고도 두터운 감정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늘 사람들한테 할머니가 자기를 몸소 키우셨다고 하면서 할머니의 보살핌과 사랑은 평생토록 잊을 수 없다고 외우군 하였습니다.

리덕수는 가족들중에서도 둘째삼촌 리지헌을 가장 자랑스럽게 받들고 있었습니다. 1947년, 리덕수가 4살 되던 해에 둘째삼촌은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하였습니다. 아쉽게도 둘째삼촌은 전투에서 해방군에 입대한 바로 그 해에 희생되였다고 합니다. 둘째삼촌의 이름은 지금도 왕청현의 렬사비에 아로새겨져있습니다.

리덕수는 8세가 되던 1950년에 동광향 금성촌에서 소학교를 다니게 되였습니다. 그때는 동광향 치고 금성촌에만 소학교가 유독 하나 있었습니다. 학교는 금성촌 농민들이 아이들을 공부시키려고 원래 일본인들이 살던 집을 허물어버리고 그 벽돌로 지은 소학교였답니다. 리덕수는 그때 자기보다 몇살 더 년상인 고모와 같이 금성촌에서 거의 1년 반 동안이나 하숙을 하면서 함께 공부하였다고 합니다.

고향의 돌배나무와 옹달샘

리덕수는 첨산자에서 동년을 보냈습니다. 리덕수의 인상 속에 첨산자는 인간세상에서 둘도 없는 무릉도원이였습니다.

리덕수네 집은 비스듬한 산비탈 한중턱에 자리잡고 있어 집을 나서면 줄기줄기 뻗어나간 장백산 동쪽의 산발들이 한눈에 안겨왔고 발밑을 내려다보면 한점 오염되지 않아 손으로 그대로 움켜쥐여 마실 수 있는 깨끗한 시내물이 찰랑찰랑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리덕수의 기억 속에 제일 인상이 깊은 것은 고향에 있는 그 키가 크고 가지가 무성한 돌배나무와 그 아래에서 일년 사계절 쉬임없이 퐁퐁 솟아오르는 옹달샘이였습니다.

리덕수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억할 때마다 비록 구차하게 살았지만 그때의 생활이 즐거웠다고 이실직고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동년을 그리워하고 자기 고향을 깊이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절 리덕수의 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그 때 동네 아이들은 모두 리덕수가 들려주는 옛말이라면 귀를 가시고 들었다고 합니다. 나어린 리덕수가 아마 어려서부터 남다른 조직능력, 호소력과 응집력을 보여주었던 일화입니다.

그 키 큰 돌배나무 한그루와 그 아래에서 송송 솟구치는 옹달샘에는 리덕수에게 있어서 그림이나 시와 같이 아름다운 동년의 추억이 깃들어있었습니다. 그 돌배나무는 리덕수의 동년에 무궁무진한 즐거움을 가져다주었고 그 옹달샘은 리덕수의 소박하고 착한 마음의 터전을 차분히 적셔주었습니다. 돌배나무와 옹달샘 그리고 첨산자의 순박한 인정은 리덕수의 일생에서 마냥 떨쳐버릴 수 없는 애틋한 향수로 남아있었습니다.

썩 후에 리덕수는 연변주위 서기로 있을 때 선후하여 두번이나 동광향에 다리를 놓아주는 공사를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옛날 소학교와 중학교를 다닐 때 그는 날마다 그 강을 신을 벗고 건너다녀야 했습니다. 겨울에는 그나마 강이 얼어붙어 그냥 얼음 우로 다닐 수 있었고 여름에는 그저 신발만 벗으면 건너갈 수 있었지만 초봄과 초겨울 이 두 계절은 힘든 고비였습니다. 특히 시골의 겨울은 살을 에이는 그 차가운 랭기가 뼈 속까지 파고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 아픔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고향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다시는 옛날 자기가 걷던 옛길을 밟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원 중국조선족소년보사 한석윤 사장과 함께

신 한컬레 그리고 꼬마나무군

리덕수의 아버지는 낫 놓고 기윽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의 농민으로 한평생 문맹의 서러움에 시달려왔기에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아들만은 기어코 문화지식이 있는 사람으로 키워내리라.”는 오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리덕수가 금성촌에 하숙하면서 공부할 때 하숙집에는 고모 벌 되는 김춘자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덕수의 공부를 곧잘 도와주었는데 그의 도움으로 리덕수는 학습성적이 줄곧 앞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소학교 2학년 무렵, 나어린 리덕수가 집으로 다니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금성촌으로 이사를 오게 되였습니다. 2학년 때 리덕수는 담임을 맡은 연변사범학교를 갓 졸업한 신만순선생님과 박선생님의 관심과 사랑도 많이 받았답니다. 리덕수는 학습성적이 우수하였고 학교의 각종 활동에도 매우 적극적이였으므로 소선대에도 인차 가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후 그는 선후하여 소대장, 중대장과 대대장을 맡게 되였습니다. 매일 학교에서 업간체조를 할 때면 리덕수는 전교 학생 대렬 앞에 나서서 표준동작을 보여주었는데 그 시절을 회억할 때마다 리덕수는 자신을 키워주고 아껴준 모교의 선생님들을 더없이 감격해하군 하였습니다.

리덕수는 학창시절에 축구를 제일 즐겼답니다. 소학교 5학년 때 그는 벌써 학교 축구팀 주력 선수였습니다. 그러나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집에서는 축구공 하나 사줄 만한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솜과 누데기로 ‘뽈’을 만들어 다시 노끈으로 꽁꽁 얼기설기 조인 다음 축구공처럼 차면서 즐겼답니다. 금성소학교 축구팀은 전 향 소학교 축구경기에서 늘 우승을 따냈답니다.

리덕수는 어릴 적에 집형편이 너무 어려워 신을 신지 못하고 다닐 때가 많았습니다. 겨울철을 제외하고 봄, 여름, 가을에는 거의 맨발 바람으로 학교를 다니다 싶이 하였습니다. 13세가 되던 1956년, 리덕수는 왕청현2중에 입학하게 되였고 그곳에서 초중을 이어 고중까지 다녔습니다. 금성촌에서 왕청 현성까지는 왕복으로 15킬로메터 되였는데 도중에 강을 하나 건너야 했습니다.

초겨울이나 초봄 때면 강물이 너무 차서 큰 고역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집에서는 너무도 안스러워 신발 한컬레를 사줬습니다. 하지만 리덕수는 평소에 맨발로 걸어다니다가 학교 근처에 이르면 다시 신발을 신군 하였습니다. 학교에 제시간에 도착하려면 날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달음박질해야 했는데 그래도 1시간 푼히 걸렸습니다. 산에는 산짐승들이 많아 무시무시했지만 리덕수는 한마을의 아이들과 약속하고 함께 학교와 집 사이를 오가면서 굳센 인내력을 키웠습니다. 그래서 대학에 입학한 후 그는 교내 마라손 선수로 소문을 놓기도 하였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40돐 경축 대회에서 시민들과 함께


문학소년으로부터 대학생으로

리덕수는 문학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초중에 입학한 후부터 짬을 타서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였는가》와 같은 소설들을 탐독하였습니다. 책을 사서 볼 형편이 못되였으므로 늘 남들한테서 책을 빌려보았습니다. 리덕수는 또 시 쓰기를 좋아했는데 그 당시 《연변일보》와 《연변월간》 등 간행물에 작품을 발표하기도 하였답니다.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간한 한 시집에 그가 쓴 시 한수가 수록되였는데 제목은 <장알>이였습니다. 소학시절 동창생을 우연히 만나 악수하면서 온통 장알이 박힌 손에 와뜰 놀라 받은 감수를 쓴 시였습니다.

초중과 고중을 다닐 때 리덕수는 학비와 기타 잡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땔나무를 해다 팔아야 하였습니다. 소와 발구를 빌려다가 첫날에는 나무를 하고 다음날에는 나무를 실어내리고 세번째 날에는 땔나무를 집에 실어오고 또 시장에 나가 팔아야 했습니다.

대학을 다닐 때에도 리덕수는 겨울방학이 되면 집에 돌아와 땔나무를 해다가 팔아서 집부담을 덜어드렸습니다. 그때 시장에서 땔나무를 파는 소년을 보고 그가 금성촌의 학생이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었습니다. 대학을 다니면서도 땔나무를 해다가 파는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도 많이 숭엄해졌다고 합니다. 때로는 나무가 팔리지 않으면 그대로 싣고 돌아갈 수도 없어 그냥 식당 주인집에 부리워놓을 때가 일쑤였다고 합니다…

대학 입학시험을 앞두고 리덕수는 문학소년의 꿈을 접고 정치학과를 지망하였습니다. 정치과목을 가르치던 강선생님은 “정치는 하나의 엄청난 학문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의 사회적 실천 범주에 속한단 말이요. 만약 앞으로 덕수가 ‘벼슬’길에 오르게 되더라도 반드시 정치를 잘 배워서 만천하의 백성들을 위해 봉사해야 한단 말이요.”하고 의미심장하게 말씀하시더랍니다.

그해 왕청현에서는 겨우 13명이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였는데 동광향에서는 리덕수가 유일하게 대학에 입학하였답니다. 마을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모두 흥이 나서 서로 다투어 희소식을 전했습니다. ‘연변대학 정치학부’라고 입학통지서에 씌여져있었는데 마을사람들은 리덕수가 ‘정치대학’에 붙었다고, 앞으로 큰 일을 해낼 인재가 마을에서 나왔다고 저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답니다.

간고한 대학생활

대학생활은 두메산골에서 온 리덕수에게 있어서 별유천지와도 같았습니다. 특히 대학 도서관은 리덕수에게 있어서 더없이 소중하였고 배움에 주린 그에게는 망망한 지식의 바다와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대학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역시 생활난이였습니다. 그리고 또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계절은 겨울이였습니다. 가을에 겨울옷을 바꿔입을 때가 되여도 리덕수에게는 털내의와 솜바지 같은 방한복이 없었습니다.

도서관에 가서 난방장치 옆에 앉아 책을 보아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여름에 입던 두 홑바지 사이에 솜을 얼마간 넣은 다음 실로 두 바지를 누비여 꿰맸습니다. 그는 이렇게 난생처음 자기 손으로 솜바지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대학을 다니는 몇해 동안 그는 이렇게 자기 손으로 만든 ‘특제 솜바지’를 입고 차디찬 한겨울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대학을 다니는 기간 리덕수는 이부자리도 자기절로 뜯어 씻었습니다. 이부자리 겉과 안을 뜯어서 씻어 말린 다음 기숙사에서 이부자리를 다시 꿰매였습니다. 어려서부터 가난하게 자라오면서 리덕수는 자력갱생과 검소한 생활습관을 길렀기에 생활에서 그 어떤 어려움에 봉착하든지 자기 스스로 방법을 대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마침 정부에서 사범류 대학인 연변대학의 학생들에게 매달 18원씩 조학금을 지급하였습니다. 3원은 책값, 15원은 식비였습니다. 경제래원이 없는 리덕수에게 있어서 조학금은 그야말로 가물에 단비와도 같았습니다. 그나마 한달에 리발 한번, 일주일에 목욕 한번 하는 것 같은 건 모두 교내에서 해결할 수 있었고 병이 나면 연변병원에서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리덕수는 자신의 대학생활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만큼 대학을 다니면서 그의 사상은 날로 성숙되여갔습니다. 중국공산당에 가입해야 한다고 느낀 그는 대학교 2학년이 되자 당조직에 첫번째 입당신청서를 써서 바쳤습니다. 당시 리덕수는 정치학부 공청단 총지부 선전위원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여 리덕수는 대학교 3학년 때인 1965년 4월 26일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습니다.

1965년 6월, 입당한 지 얼마 안된 리덕수는 사회주의교양공작대에 선발되여 안도현 장흥인민공사에 내려가서 사회주의교양운동에 참가하게 되였습니다. 사회주의교양사업에 참가하게 된 것은 리덕수에게 있어서 아주 좋은 단련의 기회가 되였습니다. 사회주의교양사업 가운데서 리덕수는 공작대 지도부와 대원 그리고 사원군중들의 한결같은 긍정을 받았습니다. 1966년 4월 26일, 리덕수는 중국공산당 정식 당원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첨산자, 두메산골이 키워낸 소년의 꿈은 장백산 정기를 타고 유유히 흘러가는 두만강처럼 갖은 풍상고초를 이겨내고 성숙의 봉우리로 내처 줄달음쳤습니다.

리덕수 략력:

리덕수는 중공 왕청현 천교령진 부서기, 왕청현 상무위원 겸 공청단왕천현위 서기, 왕청현위 선전부 부장, 부서기, 공청단 중앙위원회 위원, 공청단길림성위 부서기, 길림성청년련합회 주석, 중공룡정현위 서기,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위 서기, 주장, 중공길림성위 상무위원을 력임.

1988년에는 길림성 부성장, 1990년 11월부터 1992년 9월까지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 1992년 1월에는 중국소수민족대외교류협회 회장을 맡았습니다. 1992년에는 중공중앙통전부 부부장 중임을 맡았고 1997년 5월에는 중화해외련의회 제1기 부회장, 1998년 3월에는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 요직을 맡았고 2003년 3월에는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을 련임.

림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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